여는 글
여는 글

1974년, 지금으로부터 38년 전이다. 나는 예천중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유학을 왔다. 까까머리에 카키색 교복을 입고 있었다. 서울은 낯설고 번화했다. 서울 연희중학교에서 녹번동 친척집으로 오는 버스를 타면 나는 늘 내리는 정류장을 지나쳤다.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담임선생님은 같은 동네에 사는 반 아이를 나와 같이 동행하도록 붙여 주었다. 그제야 나는 집을 잘 찾아가게 되었고, 그 아이는 외로운 서울에서 첫 서울친구가 되었다. 책을 묶으려는 이 순간 왜 녹번동 시민아파트가 떠오르는 것일까. 비 오는 날이면 연탄가스 냄새가 나고 눅눅한 장판에서 곰팡내가 나곤 하던 집. 나는 녹번동에서도 계속해서 이사를 다녔다. 리어카에 이삿짐을 싣고 1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했다. 당시는 전세기간이 1년이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없었던 시절이어서 집 주인이 경매를 당해 전세금 35만원을 떼인 적도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20년 동안 공직자로서 근무지를 옮겨 다녔고, 직장을 바꾸었다. 세상은 급속하게 변해갔다. 나는 늘 내리는 정거장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내릴 역을 지나치곤 했다. 나는 늦되고 점점 속되어 가는 듯도 했다. 내가 그 동안 써온 글을 여기 묶으려는 것은 어쩌면 내가 가야할 길의 이정표를 다시금 세워보고자 하는 뜻인지 모른다. 속도의 현기증 속에서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쳐 울상을 짓던 까까머리 소년이 다시금 제 집에 찾아들 듯. 나는 시골 면서기로 있던 부친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장래희망이 법관이었고, 학창시절 내내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문화일보 이병규 사장은 ‘경북지방의 척박한 지리와 토양이 권력욕을 낳았다’고 분석하였는데, 내가 법관이 되었으면 하는 부친의 희망 속에는 일종의 권력욕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비로서 당연히 고위공직을 맡아야 한다는 희망이 법관으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공직 중에서 일제시대에 가장 위세등등했던 것이 고등문관이었던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가끔 그럴 바에는 이왕이면 법관보다 더 큰 꿈을 꾸도록 지도하셨더라면 내가 다른 길을 갔을 텐데 하고 생각한다. 나는 “꿈꿀 수 있다면 실현할 수도 있다(If you can dream it, you can do it).”는 월트 디즈니의 말을 믿었다. 지금 내가 가진 꿈이 미래에 나의 현실로 나타난다고 굳게 믿었다. 초등학교 때 나 혼자 <유엔사무총장>에 대한 꿈을 그려본 적은 있으나 바로 접었다. 초등학교 6학년으로 기억된다. 사회시간에 국제연합을 배울 때다. 당시 10월 24일은 유엔의 날로 휴일이었다. 제일 높은 유엔사무총장이 되고 싶었다. 공책 겉장에 장래희망 ‘유엔사무총장’이라고 써놓았다. 그러다가 우리나라가 비회원국이란 걸 알았고, 그 꿈을 바로 포기했다. 유엔에도 못 들어간 대한민국에 정말 실망했고 좌절했다. 다시 법관의 꿈으로 되돌아갔다. 그 후 우리나라가 1991년 유엔에 가입하고 2005년 반기문 사무총장이 탄생하고 2011년 연임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며, 그 때 꿈을 포기한 게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1989년, 서울유학 15년 만에 드디어, 어릴 적부터의 꿈이었던 법관이 되었다. 그 이후 여기저기 기고하거나 써 둔 에세이나 칼럼 종류의 글을 모아 보았다.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하던 지난 2000년에 첫 저서인 <인신구속과 인권>을 펴내면서, 나는 별도로 이런 일상적인 글을 모아 책을 묶으려다 그만 둔 적이 있다. “판사는 판결로만 말한다.”는 법언(法諺)이 있듯이 현직 법관이 그런 책을 낸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2004년 변호사가 되고 나서야 내 글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지금껏 썼던 글을 다시 돌아보는 일은 썩 유쾌한 일만은 아니다. 부끄러움이 앞선다. 부족하지만 법관·법조인·법률가의 시각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한 방식은 되지 않을까 위안을 삼는다. 이 또한 ‘법률가의 문화적 사명’이 아닐까 내심 자기합리화를 해본다. 2011년 1월 30일. 나는 아내(김용희)와 함께 그리스 에게 해(海)에 있었다. 나는 그때 에기나(Aegina) 섬에 있는 그리스정교회 아기우스 넥다리우스 성당 앞에 서 있는 사이프러스(Cypress) 나무 한 그루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이프러스는 푸른 촛불처럼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나무는 하늘을 향해 타오르고 있었다. 솟아오르려는 생명력. 사이프러스는 하늘을 향해 기도를 하고 있는 듯했다. 매혹적이었다. 빈센트 반 고호(Vincent van Gogh : 1853-1890)가 죽기 직전에 그토록 천착(穿鑿)하며 화폭에 담아냈던 아름다운 죽음의 나무가 사이프러스다. 미술평론가들은 고호의 사이프러스 그림에는 비참한 현실에 대한 울분이 배어 있다고 한다. 나는 사이프러스를 보면서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좀 더 역동적인 삶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좀 더 높은 곳을 향한 열망, 도전과 열정에 대하여 생각했다. 죽음을 뚫고 일어서려는 생명력 있는 삶.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진리는 만유인력의 법칙이 아니라 중력을 뿌리치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세상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행복한 세상』은 내가 늘 좌우명으로 생각하는 법치의 세계다. 우리나라도 이제 법치주의의 내실화 과정에 들어갔다. 과거 법의 영역 밖에 있던 쟁점들을 법의 잣대로 재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나의 관심은 늘 법의 지배와 인권보장의 이념이 확산되는 추세에 맞춰져 있다. 나는 관련 법 제도의 개선책과 입법적 방향까지 적극 제시하고, 비판보다는 대안(代案)과 전망(展望)을 앞세우는 자세로 글을 써 왔다고 자부했다. 존경하는 어느 선배변호사의, “어느 자리에서건 어느 이슈에 대해서건 갑작스런 질문이나 코멘트 요청을 받아 발언을 할 때 실언하지 않고 잘 할 수 있도록 늘 어느 이슈에 대해서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충고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늘 공부가 부족함을 느낀다. 이 책에 실린 글 중에는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것도 있다. 여기저기에 기고했던 글은 출전을 밝혔는데, 이는, 그 내용이 현재로서는 빛이 바랬지만 그 당시로서는 시의성이랄까 어느 정도 의미가 있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함이다. 제1장부터 제5장까지는 법조계의 현안에 대해 평소 고민했던 나의 생각과 나의 주장을 몇 가지 범주로 나누어 실었다. 헌정체제와 법치주의, 사법개혁의 방향, 형사사법과 인권보장, 국민을 위한 재판, 한국법조의 선진화로 나누어 정리하여 보았다. 제6장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기고한 글을 중심으로 묶은 것이다. 제7장은 법관 시절에 기고하거나 쓴 글을 모은 것이다. 제8장과 제9장은 법관 시절의 에피소드 2개를 정리하였다. 마지막 제10장은 2006년 금융산업구조개선법 개정 과정에서의 나의 주장을 실은 것이다. 국회의 입법과정에서 헌법정신이 어떻게 반영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실례로 삼고자 한다. ‘잠들지 않는 도시’ 뉴욕시의 형사간이법원에서는 1년 365일 24시간 밤낮으로 피의자심문과 보석심사를 하는데, 그 모토가 바로 ‘잠들지 않는 도시에서 정의의 수레바퀴는 계속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 제목을 ‘정의의 수레바퀴는 잠들지 않는다’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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